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장진태는 왜 버클리 음대 그만두고 아이링 만들었나?

디캠프(D.CAMP) 주최 ‘디시전(D.CISION)’ 창업 캠프의 첫 강사가 억스(AAUXX)의 장진태 대표란 말을 들었을 땐 약간 실망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분을 내세우고 싶었는데 장 대표는 아직 창업계 스타는 아니다. 휴대폰 손가락걸이 '아이링(i-Ring)'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지만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기대반 우려반 심정으로 강연을 지켜보기로 했다.

디시전. 17~18일, 제주 한화콘도. 17일 오전 제주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눈발이 휘날리더니 길에 수북히 쌓였다. 누군가 “제주도에서 눈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장 대표의 강연은 점심식사 후 시작됐다. “Think Big, Start Small”이란 말을 하길래 고담준론을 하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렸을 때 별명이 ‘장가이버’였다”, “대학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했다", “군복무 시절 음악에 빠져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갔다", “학교를 그만두고 2007년 귀국해 창업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 보고 부랴부랴 노트북을 꺼내 받아치기 시작했다. 다음은 장 대표가 말한 창업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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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었다. 유학 떠날 무렵 아버지 사업이 망해 유학비를 대줄 형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1000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 두 개를 주면서 “이것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전부다"고 하셨다. 첫 학기 수업료가 1000만원쯤 됐다. 수업료 내고 책 사고… 두세 달쯤 지나자 남은 돈이 200달러, 300달러쯤 됐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다.

할 만한 일이 별로 없어서 주로 식당에서 알바를 했다. 학교 친구들은 “일하러 왔냐? 공부하러 왔냐?”고 놀려댔다. 돈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명가 기질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사업 아이템은 해외구매대행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베이 같은 곳에서 물건을 사고 싶어도 마땅한 통로가 없었다. 그래서 2004년쯤 해외구매대행 서비스를 시작해 돈을 벌었다. 나랑 한국에 있는 프로그래머랑 달랑 둘이서 다 했다. 처음에는 다양한 품목을 하다가 점차 악기에 집중했다. 구매단가가 최소한 300만원이나 되고 수수료가 5~10%나 돼 한 달에 10건, 20건만 해도 학비 생활비가 나왔다.

사업이 잘 됐다. 당시 한진택배랑 거래 했는데 한진택배 사장이 사업을 팔라고 했다. 팔지 않았다. 그때 팔았다면 편하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혼자서 일하다 보니 서비스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한국과 미국이 밤낮이 달라서 제품을 제때 배송하지 못했고 고객 불만은 커졌다. 결국 2년쯤 하다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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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아이템은 악기 줄을 감고 푸는 장치를 만드는 거였다. 음악을 하다 보니 줄을 감고 푸는 게 너무 번거로웠다. 자동으로 감고 푸는 걸 기획했는데 미국은 제조업 기반이 너무 약해서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2007년 학교를 그만두고 제품 스케치만 들고 귀국했다. 당시엔 디캠프 같은 창업 지원 센터가 없어서 집 앞 차고를 월세 20만원에 빌려서 썼다. 여기서 2년 가까이 버텼다. 그때는 제조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금형업자한테 사기를 당했다. 결국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깨달았다. 발명가와 사업가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아이링(i-Ring)이 회사를 살렸다. 그걸 기획한 건 2009년이었다. 돈이 없어서 만들지 못했을 뿐이었다. 악기 제품 만드느라 부모님 돈, 부모님 친구 돈 등 3억원쯤 빚을 진 상태였다. 2010년쯤 되자 비슷한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발명가 자존심 때문에 남이 하는 건 하지 않는다. 그런데 2010년에 만난 어느 사업가가 “장 사장이 하면 더 잘할 것"이라며 “돈을 댈 테니 해 보자"고 했다. 그래서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2주만에 제품을 설계해서 도면을 넘겨줬다. 계약서 쓰기도 그렇고 그냥 믿고 넘겼다.


느낌이란 게 참 중요하다. 그 사람은 나한테 정말 잘해줬다.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주고. 그런데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걸 봤다. 꺼림칙했다. 그래서 제품 도면을 넘겨주기 전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디자인 특허를 출원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사람은 나한테 도면을 넘겨받고는 자기 이름으로 특허를 냈다. 그리고는 사람이 180도 달라졌다. 결국 특허 소송이 붙었는데 혹시 몰라서 출원했던 디자인 특허 덕분에 승소했다.


현재 아이링을 31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아이링이 이렇게 팔리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나보다 4개월 먼저 물건을 내놨다. 화가 나서 품질로 승부를 벌이기로 하고 계속 품질을 개선했다. 처음에는 3개월 쓰면 헐거워지는 등 품질이 별로였다. 그런데 개선하다 보니 소비자들이 알아봤다. 그래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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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민했던 것이 있다. 어떻게 제품을 차별화하느냐였다. 타오바오, 알리바바 사이트를 둘러봐라. 우리 디자인 베낀 제품이 너무 많다. 베트남에서도 고맙다는 메일이 날아올 정도다. 우리 제품을 베껴서 부자가 됐다는 메일이다. 난 그 사람과 거래한 적이 없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그런 메일 받았다. 처음엔 기분이 나빴는데 지금은 기분 좋다. 중국의 유명한 기업도 베낀 제품을 내놨는데 지켜보고 있다.

스타트업이 무엇으로 차별화하겠나. 마트 가 봐라. 대기업은 뭔가를 하나 붙인다. 양을 더 준다든지, 가격을 대폭 할인해 준다든지. 스타트업은 그렇게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내외 전시회에 자주 나갔다. 처음엔 전시장에서 열심히 물건을 팔았는데 그렇게 하면 장사는 되지만 회사가 성장할 수는 없다. 품질과 서비스를 끌어올려야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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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일본에 아이링을 서른셋 팔레트 수출했는데 바이어한테 긴급전화가 왔다. 할인점에 납품할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데 포장이 여기저기 떨어져 납품할 수 없다고 했다. 한밤중에 직원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가자". 직원들 데리고 일본으로 달려가 포장을 모두 수정했다. 땡볕에서 했는데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 그 후 일본 바이어한테 문자가 왔다. 고맙다고, 장기로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상대는 감동했다.

고객 피드백도 중요하다. 고객 메일이 많이 온다. 고맙다는 메일에 대해서는 직원들이 답신한다. 컴플레인을 하는 분들한테는 내가 일일이 답신한다. 이렇게 컴플레인 했던 분들이 우리 팬이 됐다. 초기 고객을 팬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한류 스타 연예인들이 아이링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성공 요인이 됐다. 가수 보아가 사진을 찍는데 유심히 보면 아이링이 계속 바뀐다. 이런 사진이 중국 아시아 등지에 퍼지면서 잘 팔리게 됐다.

제품 포지셔닝을 정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업계획을 쓸 때랑 시장에 내놨을 때는 정말 다르다. 계속 조정해야 한다. 아이링을 처음 개발했을 땐 휴대폰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자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이걸 강조했더니 팔리지 않았다. 아이링을 이용하면 폰을 세울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해 봤다.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플라스틱 고리를 하나 만들어 자동차에 폰 거치대로 쓸 수 있다고 알리자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객한테서 답을 찾았다. 원래 알았던 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전시회에 나가면 많은 질문을 받는데 5~10개로 압축할 수 있다. 이것만 만족시켜주면 성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점과 선 얘기를 하겠다. 나는 미술도 했고 음악도 했다. 돌아보면 다 의미가 있다. 대학 다닐 땐 디자인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때 배운 캐드(CAD)가 도움이 됐다. 미국 가서 음악을 공부했는데 음악 이해도가 높아졌다. 앞으로 음악 관련 제품을 많이 개발할 생각이다. 창업은 필수다.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링은 여덟번째 아이템이다. (“칠전팔기"). 도전하라.

장 대표의 강연은 여기까지. 오랫만에 멋진 창업자를 만났다. 디캠프 담당자가 장 대표를 섭외했다고 알려줬을 때 단순히 아이링을 만드는 창업자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했다. 장 대표를 만난 건 훗날 아주 의미 있는 점으로 남을 것 같다. 선전을 기대한다. /광파리

디캠프 '디시전' 창업 캠프 사진을 공유합니다. 링크.